문화예술공연
이웅철 개인전 《안전거리》
- 분야
- 전시
- 기간
- 2026.10.01.~2026.10.17.
- 시간
- 수~토요일 13~18시
- 장소
- 서울 | 인가희갤러리
- 요금
- 무료
- 문의
- in@ingahe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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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소개
2016년에 열린 이세돌과 알파고의 바둑 대결은 인간과 기술의 대결로 수용되었다. 경우의 수를 예측하여 알파고가 상대방을 공략할 때, 우리가 ‘신의 한 수’라고 부르던 것이 지능화된 기술로 발전된 지점을 보여준다. 인간에게 여전히 손은 중요하지만, 바둑판의 물리적 공간을 벗어난 손은 결정권을 가진 주체의 선택이 기술에 양도 받은 ‘한 수’로 대체된다. 귄터 안더스(Gunther Anders)가 말하듯이 행위를 노동으로, 노동을 기동 동작으로 가장하면서 우리의 손은 간접적인 차원에서 휘두르는 결정권으로 전이했다. 우리는 손으로 직접 범행을 저지르지 않아도, 버튼 하나만 눌러 상대방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 버튼을 누르기만 해도 많은 사람을 위협에 빠뜨릴 수 있는 무기가 넘치는 시대에, 인간이 치르는 죗값은 ‘기술’에 의해서 소외된다. 안더스가 분석한 시대가 핵무기가 태동한 시점이었다면, 2026년에는 AI로 얻은 답변이 비-행위를 정당화한다—“AI에게 물어보니까 그러더라고요”... 입력과 송출은 우리의 손과 머리와 연동되어, 손수를 쓰는 대신 손수를 아끼게 되었다. 그러면서 행위를 범하거나 저지른다는 감각에서 발을 빼려고 한다.
이웅철의 〈The Game〉(2026)는 일차적으로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결에 상징되는 지능화된 기술을 보여준다. 이때 바둑(Go)은 ‘가라(Go)’라는 명령어를 송신/수신하는 군사 시스템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한다. 한편, 이 작품은 QR코드를 닮았다. ‘땅따먹기’가 벌어지는 바둑판은 인간과 과학 기술의 역대적 무대에서 일상의 핸드폰으로 들어온 지 오래다. 〈The Game〉에서의 대결은 전쟁터에서 상대의 위치를 추적하는 화면과 적군의 시야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장술을 쓰는 사람 간의 대결뿐만 아니라 전쟁터와 일상생활을 점유한 시각 체계로 확장된 것이 아닐까. 폴 비릴리오(Paul Virilio)가 『전쟁과 영화』(1986)에서 분석한 당시보다 시각 기술은 발전했다. 나와 상대방의 위치를 파악하고 시시각각 움직일 때, 레이더와 드론을 비롯한 광학 장치를 통해서 상대를 직접 보기도 전에 병사는 명령(어)을 내리고 공격한다. 서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대비하여 예측할 때, 바둑판에서 점을 찍듯이 반복된 동작은 그야말로 ‘점찍는’—미래를 예견하고 상대의 위치를 파악하는 기술적 지능으로 발전하였다. 화면상의 경험은 2026년의 일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터페이스로 자리를 잡았다. 스마트폰을 비롯하여 태블릿 PC, 매장 키오스크, 후방 카메라에 이르기까지, 감시를 초월하여 우리는 일어나는 일에 간접적으로 개입할 수 있다. 버튼 하나가 신의 한 수가 될 때, 이웅철의 관심사는 간접적 경험에 질문을 던진다.
연작 〈The Line〉(2026)은 뉴스 기사에 소개된 미사일 발사 장면을 평면 작업으로 풀어낸 작업이다. 충격은 자극적이고 종종 선정적인 표현을 통해서 전해진다. 폭발, 총격, 공격에서 출발하여 붕괴, 파괴, 와해, 파편화에 이르는 이미지들은 언어보다 빠르다. 이미지는 사람들을 충격에 묶어 둔다. 언어보다 빠른 언어, 시각이라는 언어는 해석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충격에 차 있으며 시각적인 호소력을 갖기 때문이다. 이 시각 언어는 우리에게 일상적으로 침입해 온다. 그런데 이미지가 보여주는 충격은 자극과 무감각이라는 중립된 성격을 지닌다. 우리에게 이미지는 더는 충격적이지 않게 된다. 이미지 한 장에 담기는 것은 프레임 바깥의 입체적인 감각을 담기에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때 감각이 둔해지는 것은 비-행위가 되는 순간처럼, 우리가 평소에 사진을 접하는 방식과도 결부되기 때문이다. 이미지의 내용을 두고 게임 같거나 영화의 한 장면 같다고 말하기에 앞서,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이미지를 접하는지 살펴봐야 한다. 우리에게 도착하는 이미지는 게임보다 간접적이고 영화보다 몰입감이 없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오히려 픽션이든 실제로든 ‘연출된’ 것으로 생각하고 싶어 한다. 이웅철은 오히려 이 몰입감이 없는 이미지를 더 몰입감 없게 보여주는, 말하자면 껍데기의 껍데기를 강조하듯이 〈The Line〉을 선보인다. 추상화된 선과 배경은 실제 이미지보다 선명하지 않다. 그러면서 마치 게임 같다고 하는, 허구로 끌어내리려는 시선을 거부한다.
연작 〈Newspeak〉(2026)가 소통형 애플리케이션의 대화창을 연상케 할 때, 그것은 하나의 명령(어)이 동원하는 결과를 괴리 안에 풀어놓는다. ‘Pacification’(군사 개입에 의한 통제), ‘Take Out’(상대의 제거), ‘Asset’(전략적 가치가 있는 인적 또는 물적 자원)은 쉽게 입력/송출되면서, 무기질적인 표현에 인간적 행위가 제거된 측면을 보여준다.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소설 『1984년』(1949)의 무대가 된 전체주의 국가의 새로운 언어인 ‘Newspeak’를 교차하여 해석하자면, 이웅철의 작품은 오늘날 소통하는 언어가 변질을 겪었을 뿐만 아니라 의미의 축소화와 과장 사이에 벌어진 괴리를 보여준다. ‘전리품’, ‘핵○○’, 팩트 ‘폭격’이라는 단어만 생각해 봐도, 우리가 평소에 경험하는 충격은 단어 사용에 따라 이미 축소되고, 그와 대조적으로 과장된 표현—‘지옥 같은’, ‘악마적인’—또한 일상에 넘쳐난다. 말이 지시하는 것과 우리가 이미지를 통해서 경험하는 현실은 그 거리감을 사실상 가지고 있다. 직접적인 경험과 간접적인 경험 사이가 점점 무너진다고 하더라도, 여기에는 메울 수 없는 간격이 있으며 그러기에 축소와 과장이 동시에 벌어진다. 우리가 일상에서 목격하거나 다루는 언어—시각 언어도 포함하여—는 폭력성의 필터를 이미 여러 번 거친 끝에 익숙해진 것이다. 하르트무트 로자(Hartmut Rosa)가 이야기하듯이, 인간은 도달할 수 있는 것만 컨트롤할 줄 안다. 우리에게 도달한 이미지와 언어는 그 자체로 우리가 어떻게든 다룰 수 있다—허구로 치부하기도, 그냥 넘어가기도 한다. 이번 개인전에 소개되는 작업이 어떤 상황의 시각적 재현보다 소거의 방식을 취할 때, 이웅철은 쉽게 도달하고 다룰 수 없는 현실을 불통의 방식으로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