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애국자 간송 ‘전형필’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서
게시일
2010.08.09.
조회수
8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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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자
이유진

오는 8월 15일이면 우리나라가 일제강점으로부터 벗어나 해방을 맞이한 지 66년째가 됩니다. 일제강점이 시작되고 해방에 이르기까지 35년 동안 나라를 되찾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던 안중근 의사, 윤봉길 의사 등 많은 애국 열사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많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정통성을 이어가기 위해서 또는 우리나라의 귀중한 문화재가 해외로 방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문화적 측면'에서 노력을 기울였던 애국자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잘 알지 못했습니다. 지금 소개하고자 하는 '간송 전형필 선생'처럼 말입니다. 


문화제 보존을 위해 평생을 바친 문화 애국자


간송 전형필 선생의 사진(좌)과 간송미술관에 세워져 있는 간송 전형필 선생의 흉상(우) 

간송 전형필 선생의 사진(좌)과 간송미술관에 세워져 있는 간송 전형필 선생의 흉상(우)


 간송 전형필 선생은 1906년 종로 4가의 99간의 대부호의 아들로 태어나 휘문고등보통학교, 일본 와세다 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에 의해 문화재가 반출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미술품과 문화재의 수집 및 보존을 위해 평생을 바친 '문화 애국자'입니다. 이러한 우리나라의 귀중한 문화재의 수집과 보존 작업에는 오세창, 고희동, 김돈희, 안종원, 김용진, 이도영, 이상범, 노수현 등이 동참하였습니다. 오세창 선생의 고서화에 대한 감식안에 힘입어 1932년경 '한남서림'을 인수하여 고서화와 골동품을 수집하였으며, 1934년에는 성북동에 '북단장'을 개설하여 본격적으로 서화작품과 조선자기, 고려청자 등 골동품과 문화재를 수집하였습니다. 간송 전형필 선생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1938년 한국 최초의 사립박물관인 '보화각'을 '북단장'내에 개설하여 서화뿐만 아니라 석탑, 석불, 불도 등의 문화재를 수집하고 보존하는 작업을 하였습니다. 이 당시의 수집품들은 김정희, 정선, 신윤복, 심사정, 김홍도, 장승업 등의 회화작품들과 서예 및 자기류, 불상, 석불, 서적 등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이 국보 및 보물급의 문화재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음은 물론이고, 한국미술사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특히 1942년 안동의 골동품장에서 훈민정음 원본이 나왔다는 말을 듣고 당시 집 10채의 값에 이르는 11,000원이라는 큰돈으로 사들이고, 존 개츠비의 소장품이었던 고려청자를 수집한 이야기는 간송 전형필 선생의 유명한 일화이면서 동시에 그의 문화재에 대한 열정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국보를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미술관


  간송미술관의 외부 모습(좌)과 전시실 내부의 모습(우)

간송미술관의 외부 모습(좌)과 전시실 내부의 모습(우)


 이런 간송 전형필 선생이 1938년 '보화각'이란 이름으로 설립한 것이 선생이 타계한 후, 1966년에 지금의 '간송미술관'이 된 것입니다. 문화재의 가치만으로도 한국미술사에 있어서 매우 귀중한 자료이지만, 무엇보다도 간송 전형필 선생의 일생을 바친 노력을 고스라이 느낄 수 있는 공간입니다. 한국 제일의 고서화 소장처이고, '훈민정음 원본'(국보 제70호), '동국정운'권 1,6(국보 제71호), '금동계미명삼존불'(국보 제72호), '금동삼존불감'(국보 제73호), '청자압형수적(국보 제74호), '청자기린유개향로'(국보 제65호), '청자상감포류수금문정병'(국보 제66호), '동래선생교정북사상절'(국보 제149호) 등 국보 및 보물 등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박물관이라는 것이 이를 반증하기에 충분해보입니다.

간송미술관 수장품 - 훈민정음 원본(국보 제70호), 금동계미명삼존불(국보 제72호), 청자상감포류수금정문정병(국보 제66호)

간송미술관 수장품 - 훈민정음 원본(국보 제70호), 금동계미명삼존불(국보 제72호), 청자상감포류수금정문정병(국보 제66호)


이러한 사연을 담고 있는 간송미술관은 서울 성북구 성북동 97-1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4호선 한성대입구역 6번 출구로 나와서 성북동 길을 따라 성북초등학교 사거리에 가면 간송미술관 입구로 향하는 이정표를 볼 수 있습니다. 천천히 도보로 이동하게 되면 10~15분 정도 걸리고, 한성대입구역에서 나와 1111번, 2112번 버스를 이용하여 성북초등학교에서 하차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간송미술관은 평소에는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고 있으며, 매년 2회(5월 중순과 10월 중순 보름간)만 전시를 하고 있습니다(2010년 5월 정기 전시회 <조선망국 백주년 추념 회화전>, 10월 중순 정기 전시회 예정). 정기 전시회가 있는 계절은 봄과 가을로 날씨가 덥거나 춥지 않고, 복잡하지 않은 거리를 천천히 걸어보는 것만으로도 좋은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간송미술관은 홈페이지가 없기 때문에 언론 보도 및 인터넷을 통해 전시일정을 자주 확인하거나 간송미술관으로 전화를 하여 확인해 보는 것이 좋습니다.


문의/간송미술관 02-762-0442


간송 전형필 선생의 둘째 아들이자 보성학원 이사장인 전성우씨는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회상했습니다.


문화 애국자 간송 전형필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서

"가장 극적인 순간은 1936년 1월 경성구락부에서 청화백자 등 국보급 문화재 200점이 경매로 나왔을 때였지요. 일본인 거상과 경매가 붙었는데 아버님이 끝까지 버텨 결국 낙찰을 받았습니다. 그때 경매장에 있던 모든 조선인이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그리고 목이 메이도록 '만세'를 외쳤습니다."(문화일보, 2009년 8월 14일)


 "문화재를 사려고 물려받은 전답을 대부분 팔았지요. 그것은 장안 최고 갑부 가문이었던 아버님이 할 수 있는 독립운동이었던 셈입니다."(문화일보,2009년 8월 14일)


간송 전형필 선생이 문화재 수집을 시작할 때 조선인들에게는 '금싸래기땅을 팔아 사기그릇을 사는 바보'로, 일본인들에게는 '나라도 없는 주제에 골동품을 모으는 놈'으로 무시를 당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속적인 선생의 문화재 보존에 대한 소신과 열정은 조선인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나라 잃은 시기에 경매는 그들에게 있어서 단순한 일본인과의 경매가 아닌 일종의 자존심 대결로 느껴졌을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렇기에 경매에서 문화재를 낙찰 받게 되었을 때, 우리 문화재의 보존과 더불어 당시 조선인들에게는 나라 잃은 설움을 잠시 날려버릴 수 있는 기쁨과 함께 큰 용기가 주어졌을 것입니다. 광복 후에도 문화재를 찾아오기 위해 일본을 오가고,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에도 훈민정음을 포함한 중요한 문화재를 품고 피난길을 떠나는 간송 전형필 선생의 문화재 사랑 내지는 사명감. 만석꾼의 아들로 태어나 요즘 시세로 약 6,000억원이 넘었던 가산을 지녔지만, 우리나라의 문화재를 지키기 위해 또는 다시 되찾아오기 위해 이 모든 부를 사용할 수 있던 결단력과 용기. 그는 일제강점기 시대에 독립의 희망을 모으고, 그 희망을 조선인들에게 나누며 함께 독립을 꿈꾸었으며, 독립 이후의 우리나라의 정통성을 지켜내기 위해 한평생을 노력한 진정성을 지닌 '문화애국자'였습니다.


 


글/이창원(문화체육관광부 대학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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