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 형무소, 감옥에서 밤을 노래하다
게시일
2016.08.18.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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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자
고금희

 

문화가 있는 날 서대문 형무소- ‘감옥에서 밤을 노래하다.’- 

▲대문 사진 ⓒ김정은

 

1908년 일본은 국권 회복을 목표로 항일 운동을 전개하던 의병들을 가두기 위해 서대문구에 ‘경성감옥’을 세웠다. 300명 정도의 작은 인원을 수용하던 경성감옥은 3.1운동 이후 서대문형무소로 개칭하고 수용인원 3,000명에 달하는 대규모 감옥이  되었다. 광복되기 전까지 수천 명의 독립투사들이 거쳐 간 가슴 아픈 이곳은 현재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으로 자리 잡고 있다. 광복 71주년인 2016년 현재 매달 마지막 주 수요일 ‘문화가 있는 날’에 서대문 형무소에서 특별한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다.

 

 이론 강의 전 도시락을 먹는 관람객  

▲이론 강의 전 도시락을 먹는 관람객 ⓒ김정은

 

감옥에서 밤을 노래하다.

 ‘문화가 있는 날’ 저녁 7시부터 9시 30분까지 음악과 해설을 들으며 서대문 형무소를 돌아보는 야간투어 ‘감옥에서 밤을 노래하다.’가 운영된다. 서대문 형무소는 야간 개장이 불가능한 곳이지만, 이날만큼은 시린 달빛 아래 붉은 벽돌을 따라 걸으며 서대문 형무소의 전경을 돌아볼 수 있다. 30분 정도 간단하게 이론 강의가 이루어진 후 현장 해설 투어가 진행되는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시작 시각에 맞춰 강의실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대부분 아이의 손을 잡고 온 가족 단위의 관람객이 많았고, 서대문 형무소 측에서 준비한 도시락을 먹으며 이론 강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감옥 구조 판옵티콘에 대해 설명해주시는 박경목 관장님 

▲감옥 구조 판옵티콘에 대해 설명해주시는 박경목 관장님 ⓒ김정은

 

서대문 형무소의 탄생과 아픈 역사의 시작.

 7시가 되고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박경목 관장님께서 직접 이론 강의를 시작하셨다. 강의를 듣는 아이들의 연령대가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중학생까지 다양했기 때문에 최대한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서 수업이 진행되었다. 서대문 형무소가 왜 생겨야 했는지, 생기게 된 역사적 배경은 무엇인지 그리고 서대문 형무소의 구조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일본이 가진 근대 건축 기술을 총동원하여 세워졌다는 서대문 형무소. 서대문 형무소는 철저하게 판옵티콘 구조로 지어져 있다. 판옵티콘이란 최소한의 인원으로 최대한의 수감자들을 통제시킬 수 있는 감옥 구조를 일컫는 말이다. 중앙부에 있는 간수의 자리에서는 모든 수감자의 행동이 보이지만, 수감자들의 입장에서는 간수가 보이지 않는다. 그 때문에 간수가 그 자리에 없더라도 심리적으로 감시를 당하고 있는 듯한 기분을 들게 해 끝없는 자기 검열을 하게 만드는 건축물이다. 이런 곳에 갇힌 독립투사들의 감옥 생활이 얼마나 끔찍했을지 이론수업이 진행될수록 분위기가 고요해지곤 했다. 약간은 어려울 수 있는 강의였지만, 박경목 관장님께서는 아이들이 지루해하지 않고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계속 질문을 유도했다. 씩씩하게 대답한 아이들에게는 상품을 주기도 하고 농담도 섞어가며 재미있게 진행을 해주셨다.

 

전시관 투어를 하는 모습  

▲전시관 투어를 하는 모습 ⓒ김정은

 

서대문 형무소를 거쳐 간 독립투사.

 이론 강의를 마무리하고 서대문 형무소 전시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사진 자료를 보며 당시 일본의 탄압정치에 맞선 독립투사들의 업적에 대해 자세한 해설이 이어졌다. ‘감옥에서 밤을 노래하다.’ 프로그램은 모든 해설을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관장님께서 해주시기 때문에 지금껏 들을 수 없었던 독립운동에 얽힌 비화들에 대해서도 들을 수 있었다. 실제 지하 고문실과 옥사로 나가기 전 독립운동가 수형 기록표를 이용해 벽을 꾸민 추모공간으로 이동했다.

 

안창호 작사 거국행 

▲안창호 작사 거국행 ⓒ김정은

 

 1910년 5월에 우리나라의 일간 신문 중 하나였던 대한매일신보에 거국행이라는 노래가 수록된다. 거국행은 안창호 선생님께서 미국으로 망명할 당시 조국을 떠나야만 하는 슬픈 심정을 담아 지은 시에 음악을 붙여 만든 곡이다. 같은 해 8월 대한제국의 통치권이 강제적으로 일본에 양도 되고 안창호 선생님의 본격적인 독립운동이 시작된다. 폭풍우가 심한 이 시기가 지난 후 훗날 다시 꼭 만나자는 염원을 담은 가사로 나라 잃은 백성의 계몽가요로 꾸준한 사랑을 받았다. 거국행을 들으며 보는 5천 명의 독립운동가 수형 기록표는 참 애달프게 다가온다. 5천 개의 수형 기록표 중 유관순 열사처럼 유명한 독립운동가의 기록표도 존재한다. 하지만 서대문 형무소 측에서 따로 표시하지 않았다고 한다. 독립을 염원하는 마음에 경중이 어디 있겠는가? 모든 독립운동가분께 존경을 표하는 서대문 형무소 측의 배려가 돋보이는 부분이다.

 

100가지의 고문을 참아내야 했던 독립투사.

지하고문실 

▲지하고문실 ⓒ김정은

 

 다음으로 발길을 옮긴 곳은 지하고문실이었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일어난 고문은 독립투사들을 인격체로 보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방증이라 할 수 있다. 손톱 뽑기, 손톱 밑에 바늘 찌르기, 고춧가루를 탄 물을 코에 들이붓기, 게다가 여자 수감자에게는 성고문까지 행했다. 서대문 형무소 지하에 마련된 지하고문실은 고문을 받는 독립운동가의 모습을 모형으로 재현해 놓았다. 전시관을 둘러보면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자유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는 곳이다. 실제로 체험해 볼 수 있는 벽관이라는 고문도구도 있다. 벽관은 나무로 만들어 놓은 관과 같은 모양새를 한 고문 도구다.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초등학교 3학년 남학생이 벽관 체험을 위해 안으로 들어갔다. 어린아이였지만, 벽관의 내부는 매우 좁아서 앉거나 움직이는 행동은 전혀 할 수 없었다. 성인이 들어간다면 신체적인 압박과 정신적인 고통까지 따르는 고문도구이다. 벽관의 체험과 당시 고문과정에 대한 해설을 들으면서 해당 장소가 주는 무거운 분위기에 무서워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순국선열의 넋이 어린 실제 장소였기 때문에 참여자 모두 참담한 마음을 가지고 야외 옥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빛 하나 들지 않던 먹방

옥사 내부  

▲옥사 내부 ⓒ서대문 형무소

 

 0.75평에 햇빛도 하나 들지 않는 답답한 독방이 있다. 방 내부가 먹처럼 까맣다고 하여 먹방이라고 불렸다는 이곳. 서대문 형무소 옥사 한편에 마련된 독방이다. 독립을 외치다 이곳에 갇히게 되면 한 달에 한 번만 외출이 허락됐고, 취침시간을 제외하곤 마음 편히 누워 있지도 못해 항상 가부좌로 앉아 있어야 했다. 독립운동가는 노역도 시키지 않기 때문에 밥도 거의 주지 않아 여름에는 방안에 비치된 요강에 꼬인 구더기를 먹으며 연명해야만 했다. 독방 외에 일반 옥사도 상황은 비슷했다. 4~5명 정도가 알맞을 좁은 방에 40명을 수감 시키고 서로 대화하면 일본 순사는 지독한 고문을 가했다. 대화조차 마음 편히 할 수 없었기에 자신이 갇힌 방 바로 옆에 새로운 수감자가 들어오면 벽을 두드리곤 했다. 이것을 비밀통방 이라 하여 벽을 두드리는 소리로 의사소통 하던 방식이다. 질문은 ‘당신은 왜 들어왔소?’, ‘고향은 어디고 사건내용은 뭐요?’ 등을 물었고, 서로 존경을 표하며 소통하고 단결해왔다. 독립군가를 들으며 좁디좁고 차가운 옥사를 둘러보는 모두가 숙연해졌다.

 

독립운동가의 눈물을 마시고 자란 통곡의 미루나무

통곡의 미루나무  

▲통곡의 미루나무 ⓒ김정은

 

 옥사를 나와 사형장 쪽으로 걷다 보니 커다란 미루나무 한그루가 눈에 들어왔다. 이 나무의 이름은 통곡의 미루나무이다. 애국지사들이 사형되기 전 독립을 보지 못한 애통함에 이 미루나무를 붙잡고 통곡을 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사형장 안에도 같은 날에 식재된 미루나무가 있지만, 한눈에도 확연하게 차이가 날 정도로 자라지 못했다. 형장의 이슬이 되어버린 독립투사들의 억울한 한 때문에 잘 자라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본 사형장에서 사형된 인원은 약 400명인 것으로 추정되는데 실제 사형기록은 165건만 남아 있다. 1944년부터 1945년까지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 되어 있던 분의 증언으로는 광복이 되던 당일에 많은 수의 사형집행이 진행되었다고 한다. 패망하던 그 순간까지 일제는 어떤 진실을 숨기고 싶어서 그런 만행을 저지른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사형장은 빼앗겼던 조국을 되찾았다는 소식을 접하기도 전에 돌아가신 분들의 애통함이 가장 크게 느껴졌던 장소였다.

 

유관순 열사가 순국한 여옥사

여옥사 거울의 방  

▲여옥사 거울의 방 ⓒ김정은

 

 ‘감옥에서 밤을 노래하다.’의 마지막 투어장소는 여옥사다. 서대문 형무소 복원에  지대한 공적이 된 것이 바로 여옥사의 발굴이다. 본래 서대문 형무소는 경기도에 서울구치소가 생기면서 철거 후 독립공원이 만들어질 계획이었다. 독립공원 조성을 위한 철거 작업 도중 기록으로만 전해지던 여옥사 지하공간이 발견된다. 여옥사의 지하공간은 유관순 열사가 갇혀 순국하신 후 악명 높은 유관순굴이라 불리며 사용을 금지하고 밀폐시켜 놓은 곳이다. 지하공간이기에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 기록에만 존재하던 곳이고, 유관순 열사의 순국 장소이기에 학계와 독립운동단체에서 엄청난 관심을 둔 공간이었다. 그 공간이 발굴되자 ‘아픈 역사이지만 독립운동가를 위한 추모공간이자 역사관으로 복원해야 한다.’ 라는 의견들이 모여 현재의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이 생긴 것이다. 1920년에 우리 민족의 아픔을 노래한 봉선화라는 곡을 들으며 여옥사를 둘러보았다. 옥사마다 갇혔었던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사진과 수감이유가 자세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특이하게 거울방이라 하여 거울에 여성독립투사들의 사진을 전시해 놓았는데 방에 들어가면 마치 그분들에게 둘러싸인 듯한 기분이 느껴져 경건해지는 공간이다.

 

 옥사 내부를 보고 있는 관람객 

▲옥사 내부를 보고 있는 관람객 ⓒ김정은

 

'감옥에서 밤을 노래하다.’ 프로그램 일정 

▲‘감옥에서 밤을 노래하다.’ 프로그램 일정 ⓒ서대문 형무소 홈페이지

 

광복 71주년 순국열사들이 진정 원했던 것.

 여옥사를 끝으로 ‘감옥에서 밤을 노래하다.’는 끝이 났다. 우리나라 역사상 너무나 끔찍하고 애통했던 일제강점기 시절에서 벗어 난지 채 100년도 되지 않았다. 그 시절에 살아계셨던 분들도 현재 많이 살아계시고, 일제강점기와 관련된 위안부와 친일파 등 아직 해결되지 못한 문제들이 너무나 많다. 본 프로그램을 진행하시는 박경목 관장님께서도 “단순하게 일본이 싫다가 아닌 이곳에 수감된 사람들이 지향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일본 식민시대의 시작과 끝의 장소인 서대문 형무소. 일제의 잔혹함에 맞서 선조의 목숨과 맞바꾼 이 땅의 자유와 평화에 대해 우리는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는가? 다가오는 광복절엔 독립투사들이 조국을 위해 흘린 눈물과 광복의 의미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행사 안내

 광복절 서대문 형무소 행사 안내  

▲광복절 서대문 형무소 행사 안내 ⓒ2016 서대문독립민주축제 블로그

 

일시 : 2016년 8월 14일 오전 10:00 ~ 8월 15일 오후 5:00

장소 : 격벽장 내외, 여옥사 부속동 복원 휀스, 9옥사 주변

주관 : 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8.15준비위원회


2016 서대문독립민주축제 블로그 : http://blog.naver.com/sidfest

 

문화체육관광부 김정은 대학생 기자 부경대학교/사학과 ioneco1788@naver.com 문체부 대학생기자단 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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