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을 패션에 담아 세계에 알린다, 디자이너 이상봉
게시일
2011.04.29.
조회수
5690
담당부서
홍보담당관(02-3704-9044)
담당자
이유진

옷이란 캔버스에 한글을 그리다 이상봉 디자이너

지난 2월, 세계 패션의 중심 뉴욕에서 한국의 대표 디자이너들이 소개됐다. 한국 디자이너들의 본격적인 세계 시장 진출을 위한 다양한 홍보마케팅을 후원하는 콘셉트 코리아Ⅲ가 진행된 것. 국내 디자이너의 실질적인 글로벌 비즈니스 활동을 지원해 그들의 브랜드를 해외 유명 브랜드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브랜드로 정착시켜 국가 경쟁력을 높이고, 나아가 세계 속에 한국의 패션 문화 강국으로서의 이미지를 구축하고자 문화체육관광부가 야심차게 진행하는 프로젝트다.


이번 쇼에서는 청자의 색, 쪽빛을 주제로 했는데 한국을 대표하는 디자이너 이상봉, 최범석, 도호(DOHO), 스티브 J & 요니 P가 참석했다. 이들 중 한글을 모티브로 한국 패션을 세계에 알리는데 앞장서고 있는 이상봉 디자이너를 만났다. 그와의 만남을 통해 대한민국 패션의 현재와 미래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꿈 많은 소년 이상봉 디자이너

디자이너 이상봉 패션 쇼 및 수상 및 대외활동

ㆍ패션 쇼

2011 인천공항 개항 10주년 기념 갈라 디너 패션 쇼

2011 문화체육관광부 주최 컨셉코리아Ⅲ(Cultural Treasures 2011) 프레젠테이션 및 전시

2010 제26회 코리아 베스트 드레서 2010 백조시상식 초정 디자이너 패션 쇼

2010 강남패션페스티벌 대한민국 대표 디자이너 패션 쇼 외 다수

ㆍ수상 및 대외 활동

2011 대한민국 패션품질대상 대상 수상

2010 외신홍보상 디자인부문

2010 에스모드 서울 심사위원

2010 국제 패션아트 비엔날레 인 서울 심사위원

2010 서울 국제 자전거 디자인 공모전 심사위원 외 다수



이상봉 선생님 안녕하세요. 2011 서울시 지정 탑 디자이너 3人 선정되셨어요. 정말 축하합니다. 소감 한 말씀 해주세요.

(쑥스러워하며) 감사합니다. 많은 분이 제게 관심을 가져주신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점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상이란 것은 약이 될 수도 있지만 자칫 독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상이란 것이 하나의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그 시작을 자만 때문에 망쳐버리게 된다면 안타까울 거예요. 제 이러한 교훈을 후배들에게 자주 말한답니다.


올해로 디자이너가 된 지 31년이 접어들고 계십니다. 처음 디자이너의 길을 걷게 된 계기가 있으신지요?

제가 참 꿈 많은 소년이었어요. 꿈이 초, 중, 고를 거칠 때마다 꿈이 바뀌잖아요. 순간마다 꿈이 달랐어요. 초등학교 시절에는 종교인이 되고 싶었고 중학생 때는 오페라 가수의 꿈을 잠깐 꾸었죠. 고등학교에 들어와서는 작가가 되고 싶었죠. 그래서 대학도 방송연예과에 진학했답니다. 대학에 가서는 연극에 푹 빠졌어요. 그러다 우연히 디자인이란 분야를 접하게 되었어요. 특이하죠. 전혀 다른 과정을 거쳤는데 지금 디자이너를 하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어떻게 생각해보면 이러한 과정들이 디자이너가 되기 위한 과정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요즘 ‘멘토’의 가치가 부각되고 있는데요. 당시 선생께도 멘토라 부를 만한 분이 있으셨나요?

그때는 공부하기 바빴어요. 앎에 대해 목말랐었죠. 모든 것을 내 것으로 스펀지처럼 빨아들이기 위해 밤낮으로 공부했어요. 모든 것이 배우고 싶어 했어요. 그 노력이 저를 발전하게 했어요. 어느 분을 지목하기는 그렇고 저는 선배디자이너에서부터 외국의 디자이너들까지 훌륭한 스승이었다고 생각해요. 그 사람들을 하늘처럼 우러러봤어요. 그들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기에 지금의 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故 앙드레 김 선생님하면 흰옷에 까만 머리가 떠오르는데요. 이상봉 선생님 하면 동그란 뿔테안경과 턱수염과 민머리가 떠올라요. 이제는 선생님을 상징하는 이미지가 되어 버린 거 같은데, 혹시 특별한 의미라도 있나요?

제가 신인 때는 검은 망토와 검은 옷을 휘두르고 다녀서 이슈를 만들기 위해 캐릭터 화 했다는 오해를 샀어요. 절대로 의도한 건 아닙니다. 검은 안경, 수염은 30년 머리는 한 20여 년 된 거 같아요. 이것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캐릭터가 아니라 그냥 저 자신이에요. 게을러서 수염도 안 깎게 되었고, 머리는 나이트클럽에 가서 거울에 보니까 머리가 너무 휘날리더라고요. 그래서 그날 이후에 머리를 빡빡 밀었죠. 제 성격상 어떤 것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지 못해요. 그냥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것이 지금까지 오게 된 것이죠.



너는 내 운명, 이상봉 한글과의 만남


이상봉 디자이너하면 연상되는 것들

▲ 이상봉 디자이너하면 연상되는 것들 ⓒLie Sang Bong


이상봉 선생님 하면 몇 가지 떠오르는 단어가 있어요. 김연아 선수, 무한도전, 패션쇼 등등. 그 중 한글이 대표적이에요. 선생님께서는 한글을 디자인 요소로 많이 사용하시는데요. 처음에 한글을 의상 디자인에 사용하게 된 계기를 알고 싶습니다.

처음 1985년에 의상을 시작할 때 하얀 의상에 태극문양을 새겨 넣었어요. 우리 것에 대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죠. 그 이후 2005년쯤인가 어느 매체의 패션 콘테스트가 있었는데, 콘셉트를 잡기 위해 많이 고민했었죠. 고심 끝에 한문을 옷에 프린트해서 그것으로 대회에 참가했어요. 대회 이후에 문득 ‘한문이 아닌 한글을 쓰면 어떨까?’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 인연이 7년째 이어지고 있죠. 시작은 우연이었지만 지금은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있어요. 


한글 사용에 대해 많은 분들이 반대하셨을 것 같아요. 주위의 반대는 없으셨나요?

사실 처음에는 반대가 심했어요. 저와 함께 일하는 동료로부터 싫어했으니까요. ‘한글이 촌스러워요. 대중의 관심이 별로 없는걸요. 대중에게 인기가 많은 영어 도안을 쓰는 게 나을 거 같아요.’등 이유도 가지각색이었어요. 당시만 해도 한글이 도안 된 의상도 없었고 한글 보다는 영어를 우상시하는 경향이 짙었어요. 심지어 한국의 문화가 집결된 곳인 인사동에서도 한글이 들어간 티셔츠 한 장 보기가 어려웠으니까요. 그런 부분이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추진했어요. 


명함이 봉투모양인데요. 정말 특이해요.


이상봉 디자이너 명함

▲이상봉 디자이너 명함 ⓒ정병화


봉토 모양의 카드는 제가 31년 전 디자이너 생활을 시작할 때 처음 만들었어요. 지금까지 디자인과 재질을 바꾸지 않았어요. 그 이유는 제가 디자이너가 되기로 마음먹었던 20살 저의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서죠. 가끔 자만에 빠지려고 할 때가 있어요. 그때마다 명함을 꺼내 보고선 처음 명함을 만들던 때의 마음을 생각한답니다. ‘나는 훌륭한 디자이너가 되어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 것이다.’라고요. 봉투 안에 쓰인 ‘행복하세요.’도 그런 의미에서 써넣었죠. 저를 알게 되는 모든 분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제 마음이랍니다.



선생님께서 주신 명함을 보면 ‘Lie Sang Bong’이란 이름이 있어요. 원래는 영어이름을 쓸 때는 ‘Sang Bong Lee' 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지 않나요? Lee를 Lie로 쓰는 것도 궁금합니다.

영어식으로 표현한다면 Sang Bong Lee가 맞겠죠. 하지만 저는 그들의 표현보다는 한글 어순을 지키고 싶었어요. 세계화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요. 우리의 것을 간과하고 그들의 것에 맞춰가는 것에 대해서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Lee’를 ‘Lie'라고 쓰는 것은 남들과의 차별성 때문이에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성(姓)을 가지고 싶었어요. 바로 저 이상봉 말이죠.


의상뿐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한글 디자인을 많이 사용하셨어요. 아파트, 핸드폰 등이 기억나요. 이외에도 다른 분야에 적용한 작품이 더 있는지요.

샤인폰 , 행남자기 프랭클린 플래너 등 협업 디자인 작품. 샤인폰 행남자기 프랭클린 플래너(왼쪽에서 오른쪽 방향

▲ 샤인폰 , 행남자기 프랭클린 플래너 등 협업 디자인 작품.

샤인폰 행남자기 프랭클린 플래너(왼쪽에서 오른쪽 방향 ⓒLie Sang Bong)


제가 참여한 작품으로는 도자기, 휴대전화기, 아파트, 프랭클린 다이어리, F1 자동차 몸체 등이 있어요. 도자기를 많은 분이 좋아해 주시는데요. 저 역시 개인적으로 도자기에 애착이 가요. 그 이유는 도자기의 순백 이미지가 먹으로 쓴 한글의 고급스러움을 표현하기에 제격이기 때문이에요. 외국인들도 한글의 아름다움을 느꼈는지 도자기를 영국 빅토리아&앨버튼 박물관에 전시하더군요. 앞으로도 가능하다면 더 많은 분야와의 협업을 통해 한글과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알리는데 일조하고 싶네요.  



세계진출을 위한 밑거름, 콘셉트 코리아



2011 콘셉트코리아Ⅲ

▲ 2011 콘셉트코리아Ⅲ ⓒhttp://www.conceptkorea.org/


지난 2월, ‘콘셉트 코리아Ⅲ in 뉴욕’ 행사가 있었어요. 마치고 나신 소감은 어떠신지요.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해요. 현지반응도 무척 뜨거웠고요. 현재 진행 중인 계약도 몇 건 있어요. 무엇보다도 세계패션의 중심인 뉴욕에서 우리의 디자인을 알리게 되어 무척 기쁩니다.


행사의 전체 테마가 청자의 색, 쪽빛이었어요. 의상의 콘셉트를 정할 때 고민 많으셨겠어요. 청자의 어떤 부분에 중점을 두셨는지요.

청자는 정말 아름다운 도자기에요. 유려한 곡선에서부터 실루엣까지 모든 것이 완벽하죠. 저는 그중에서 색과 실루엣이라는 것에 초점을 맞췄죠. 청자의 고유색인 쪽빛과 은은하게 느껴지는 실루엣을 옷에 담아내어 외국인들과 언어가 아닌 색과 느낌으로 교감하려 했죠.


여느 쇼와는 달리 콘셉트 코리아Ⅲ에서는 디자인된 옷들이 실용적 측면을 많이 고려하셨다고 하던데요. 그 이유가 궁금해요.

만약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고 나만의 이상을 표현하려고 했다면 과감한 디자인을 택했을 거예요. 우리는 지금 뉴욕을 넘어 세계시장에 도전하는 사람들이에요. 그렇기에 여느 쇼에서 보이는 파격적 디자인보다는 그들의 실생활에 다가갈 수 있는 실용적 의상에 한국 고유의 문화를 담아내려고 했어요. 우리의 디자인이 세계시장에 침투하기 위해서는 실용적인 면이 강조되어야 합니다. 앞으로도 그래야 하고요.


콘셉트 코리아Ⅲ가 우리 패션계에 주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세계 4대 패션쇼는 뉴욕, 파리, 런던, 밀라노 이렇게 네 곳에서 열리죠. 4개 도시의 공통점은 유럽에 있는 선진국이에요. 영국의 산업혁명과 더불어 직물산업이 발달은 경제 성장과 함께 패션산업의 발달을 가져왔죠. 우리나라도 작년에 G20을 개최했잖아요. 이제 명실상부한 선진국입니다. 하지만 패션에 있어서는 아직 갈 길이 멀다고 생각해요. 아이디어나 기술적 문제가 아니에요. 그보다는 홍보와 그들 시장에 들어가기 위한 지원이 부족이 더 크다고 생각해요. 콘셉트 코리아는 디자이너들의 고민을 해결해 주었어요. 우리도 이제 든든한 지원군을 생겼답니다. 이제 당당히 그들과 경쟁할 수 있습니다. 비록 갈 길이 멀긴 하지만 콘셉트 코리아를 벗 삼아 잘해 나갈 수 있을 거라 확신해요.



2011 서울 패션 위크



산행과 벗을 주제로한 서울 패션위크

▲ 산행과 벗을 주제로한 서울 패션위크 ⓒLie Sang Bong


이번 쇼의 테마를 ‘산행’과 ‘벗’으로 정하셨던데요. 산행과 벗 그 의미가 궁금합니다.

우리나라 산은 무척이나 아름다워요. 산을 오르면서 자연과 교감하고 자연이 보여주는 창의적인 움직임과 의미를 옷이라는 한 폭의 도화지에 담에 내고 싶었어요. 그리고 벗은 우리 주위에 늘 함께 있는 소중한 존재잖아요. 산행을 가거나 다른 어떤 일을 하더라도 동료가 함께 하듯이 우리 주위에 산과 벗이 함께 어우러져 소통하기를 원했어요. 요새 새로운 소통은 트위터와 페이스 북을 통해서 하고 있답니다. 새로운 소통의 장이죠. 우리는 열려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쇼가 끝나고 일반인과 함께한 에프터 파티

▲ 쇼가 끝나고 일반인과 함께한 에프터 파티 ⓒLie Sang Bong


서울 패션 위크 쇼를 마치고 에프터 파티가 있었어요. 조금 특별한 점이 있었어요. 바로 파티에 쇼 관계자뿐만 아니라 일반인도 참석 한 점인데요, 무슨 특별한 의미라도 있는지요?

평소에도 행사를 마치고 그날의 수고를 풀기 위해 파티를 한답니다. 종전과 다른 점은 ‘패션 피플’이라 일컬어지는 일반인 친구들이 참석한 점이죠. 위에서 말했듯이 그들과 소통을 하고 싶었어요. 패션에 대한 제 생각과 그 친구들이 가진 생각을 옷을 매개체로 하여 공유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제 바람은 이루어졌죠. 우리는 언어가 아닌 옷으로 소통할 수 있었답니다. 



앞으로의 다짐


패션계에 대선배이신데요. 우리나라의 패션계를 이끌어 나가시는데 막중한 책임을 지셨는데요. 그에 대한 각오라도 있으신지요?

이런 표현을 들으면 왠지 쑥스러워져요. 저도 디자이너로서 인정받은 지 오래되지 않았어요. 지금도 앞을 향해 열심히 달려가고 있죠. 우리나라에는 훌륭한 디자이너들이 많아요. 그들과 경쟁하며 함께 나아가고 있어요. 만약 제가 게을러진다면 그들이 저를 추월할 것이고 제가 다시 노력한다면 그들을 따라잡겠죠. 이런 도전과 경쟁이 반복되면서 결국은 패션산업의 발전을 가져올 거로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 계속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오늘 정말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이상봉 선생님, 마지막으로 우리 패션의 세계화와 발전을 위해 하실 말씀이 있으신지요?

많은 디자이너가 우리의 패션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그것이 때론 고독하고 힘든 싸움이죠. 하지만 여러분들이 지속적인 관심과 사랑을 가져주신다면 저희에게 힘이 될 거에요. 정부 또한 지속적으로 지원했으면 좋겠어요. 콘셉트코리아도 그 중 하나일 것으로 생각해요. 단발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되어 한국의 패션을 세계에 알리는 밑거름이 되었으면 합니다.


전통미가 돋보이는 이상봉 디자이너 의상실

▲ 전통미가 돋보이는 이상봉 디자이너 의상실 ⓒ정병화


인터뷰를 하던 날은 비가 와서 그런지 하늘은 먹구름으로 가득했다. 비가 그치고 구름이 걷히면 그 어느 때보다 맑은 하늘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 패션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우리의 것을 알리기 위해 도전과 모험의 구름 속을 헤쳐 나가고 있다. 세계진출이라는 목표를 위해 많은 디자이너가 노력하고 있다. 이제 그 노력이 이제는 빛을 발할 때다. 구름이 걷히고 나면 세계라는 하늘 속에 우리 패션이 밝게 빛나는 태양처럼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한국패션의 세계의 중심에서 빛나는 그날이 올 것이라 믿는다.



문화체육관광부 정병화 대학생기자 서울시립대학교 도시공학과 aggo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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