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의 축소판 『해외문화홍보원 40년사』출간
게시일
2011.12.19.
조회수
3335
담당부서
해외홍보콘텐츠팀(02-398-1912)
담당자
위택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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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의 축소판 『해외문화홍보원 40년사』출간

- 통사·화보·전현직 기고 등 3부 구성

- 체제 홍보 → 경제 홍보 → 문화 홍보 등 ‘홍보와 소통’의 진화 과정 담겨




한 해를 마무리 짓는 종무식 날 탄생


   1971년 12월 31일. 1971년은 ‘제7대 대통령 선거’(4. 27.), ‘실미도사건’(8. 23.), ‘국가비상사태 선언’(12. 6.), ‘대연각화재’(12. 25.) 등 굵직굵직한 초대형 사건들이 잇달아 터졌던 한 해였다. 다사다난한 한 해의 마지막 날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친 공보관직제 중 개정령이 결재됐다.

   문화체육관광부 해외문화홍보원의 전신 문화공보부 해외공보관이 탄생되는 순간이었다. 올 12월로 개원 40주년을 맞은 해외문화홍보원의 기관사 『세계를 향한 두드림 세계 속 큰 울림-해외문화홍보원 40년사』(이하 ‘해외문화홍보원 40년사’)가 출간됐다.


언론과 소통해온 40년 고스란히 담아


   『해외문화홍보원40년사』는 제1부 ‘해외 문화 홍보 40년 발자취’ △제2부 ‘사진으로 보는 해외문화홍보원 40년’ △제3부 ‘해외 문화 홍보 40년을 돌아본다’로 구성돼 있다.  제1부는 12월 31일 해외공보관이 설치된 이래 역대 정부별 해외 홍보 정책 및 주요 추진 실적을 소상하게 소개하고 있다. 아울러 정책과 기관 활동과 관련한 언론 보도와 논평을 반영, 정부의 해외 홍보 정책이 언론과 어떻게 소통해왔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제2부는 72면이나 할애하여 ‘해외문화홍보원의 어제와 오늘’, ‘세계 속의 한국 문화원’ 등을 생생한 화보로 소개하고 있다. 해외공보관 개원을 알리는 박정희 대통령, 김종필 총리의 서명이 있는 결재 문서, 국제교류재단의 전신 한국홍보협회의 개원식, 첫 해외공보관 회의에 내린 박정희 대통령 유시 등 희귀한 자료들이 볼만하다.

   제3부는 지난 40년을 돌아보는 전현직 직원들의 기고들을 수록했다. 개원 초창기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들이 솔직하게 실려있다. 남북한 냉전이 최고조로 달했을 때의 대치 장면들,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비화, 88 서울 올림픽, 2002년 한일월드컵 등 해외 문화 홍보의 현장의 목소리들을 생생히 전하고 있다.

   서강수 해외문화홍보원장은 “이 책에는 북한의 대외 선전 공세로 긴박했던 창립 과정과 체제 홍보, 경제 홍보, 문화 홍보에 이르는 홍보와 소통의 진화들이 담겨있다.”라며 “아무쪼록 이 책이 우리나라의 해외 홍보를 이해하고 교훈을 얻는 유익한 사료로서 활용되기를 기대한다.”라고 밝혔다.

□ 에피소드


o 1961년 탄생할 뻔했던 해외문화홍보원

   해외문화홍보원은 이미 1961년에 탄생할 뻔했다. 1961년 12월 13일 제정된 ‘공보관 설치법’에 의해 “공보부 장관 소속하에 국내 및 외국에 공보관을 설치한다.”라고 이미 해외공보관 설치를 기정사실화했다. 동아일보는 1962년 8월11일자 ?대외선전이 강화되어야 한다? 제하의 사설에서 해외공보관의 설치를 다음과 같이 촉구하고 있다.


 <예컨대 해외공보관설치문제가 어떻게 되었는가 묻고 싶다. 이 문제는 작년 겨울에 크게 논의되었고 작년 말 공포된 ‘공보관설치법’은 “국가시책과 국가발전상 및 민족문화의 공보선전”을 위하여 국내외에 공보관을 두기로 하였고 이어 해외공보관을 뉴욕(남북미주 담당) 파리(구주와 아프리카 담당), 동경(일본과 동남아 담당)등 3개지에 두기로 결정하였으며 이 밖의 재외공관에 공보관을 두기로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계획은 해외선전의 체계 있고 실질적인 강화를 위해서 매우 현명한 것이었으나 지금까지 실시된 것은 동경공보관의 개관뿐이다. 그나마 동경공보관마저 예산관계로 활발히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고 하니 이 점 시급히 개선되어야 할 일……>


   지난 1950년대, 1960년대에도 우리의 언론은 해외 홍보의 중요함과 시급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문제는 이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경제적 여건이었다.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분산적으로 해외 홍보를 해야 했다. 통합 홍보의 필요성은 1968년 문화공보부가 발족되고 이후 해외공보관이 탄생하면서 첫걸음을 내디뎠다. 해외문화홍보원의 탄생은 민관의 오랜 고민 끝에 나온 결실이었다.



o 최장기 근속 직원 엘리자베스 리

   해외문화홍보원의 최장기 근속 직원은 일반 공무원이 아닌 1977년 1월 1일 입사한 엘리자베스 가브리엘 크래프트 리 전문위원(71세)이다. 역대 대통령 연두 교서, 장관 연설문, 주요 국가 행사 보도자료는 그녀의 손을 거쳐 나왔다 해도 과장은 아닐 정도로 주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엘리자베스 리 전문위원은 한국인의 영어 어휘나 문법실력은 미국인도 놀랄 만큼 탁월하나 그대로 직역하는 경우 ‘콩글리시’가 되는데 ‘잉글리시’로 바로 잡는 게 자신의 역할이라고 설명했다. 기억에 남는 일은 지난 1987년 당시 노태우 대표의 6·29선언 영문 번역을 감수할 때였다고.


o 해외 홍보의 전설 박신일

   전직 언론인 출신 박신일 관장(1940~2011)은 자타가 공인하는 홍보맨이었다. 어느 외교관보다도 탁월한 영어 실력, 문화에 대한 높은 식견은 생각의 차이를 떠나 기자들로부터 존경을 받기에 충분했따.

   도쿄의 외신기자 클럽에서 누가 영시를 많이 암송하는지 미국 기자와 겨루기도 했으며 기자들과 토론을 하다 지루하다 생각되면 자기 집으로 자리를 옮겨 가족까지 힘들게 하는 등 그의 인생은 바로 열정 그 자체였다. ‘세월이 가면’의 시인 박인환(1926~56)은 그의 친형이다. 브래들리 마틴 뉴스위크 전 도쿄지국장은 장문의 추모기를 남겼으며 월스트리트 저널의 벅 타압프 기자는 “그리고 나의 영광은 나에게 그런 친구가 있었다는 것(And say my glory was I had such friend)”이라는 예이츠의 시구를 인용하여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박신일은 해외홍보 40년에 큰 족적을 남긴 전설이 됐다.


o 문화와 홍보와 분리, 다시 일원화되기까지 20년


   해외공보관이 출범하기 한 달여 전인 1971년 11월 초만 해도 잠정 명칭은 해외홍보원이었다. 그러나 해외공보관으로 출발했다. 1990년 1월 공보처 해외공보관으로 소속이 바뀌었다. 다시 1998년 2월 문화관광부 해외문화홍보원으로 1년여간 바뀌었다. 또다시 1999년 5월 국정홍보처 해외홍보원으로 바뀌었다가 2008년 2월 문화체육관광부 해외문화홍보원으로 바뀌었다. 문화와 홍보로 이원화됐던 통합 해외 홍보 기능을 되찾기까지 20년이 걸린 오랜 여정이었다.

붙임: 『세계를 향한 두드림 세계 속 큰 울림-해외문화홍보원 40년사』PDF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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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체육관광부 해외문화홍보원 해외홍보콘텐츠팀 위택환 사무관(☎ 02-398-1912)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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