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라데팡스가 외면받는 이유
게시일
2010.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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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자
조수빈

이제 공공디자인을 빼놓고 정책을 이야기할 수 없는 시대가 됐다. 벤치나 간판, 안내판 등 거리를 채운 각종 공공시설물로부터 건축은 물론 도시 기반시설에 이르기까지 우리 삶의 공간을 채우고 있는 모든 것들이 디자인의 영역에서 자유롭지 못 하다. 디자인이 그저 외양을 바꾸는 것이 아닌 우리의 생각과 정서, 인간관계를 변화시키는 중요한 요소인 까닭이다. 대한민국 정책포털 ‘공감코리아’는 연속기획 ‘공간이 사람을 바꾼다’를 통해 디자인 시대를 살아가는 현 정부의 공공디자인 철학과 정책을 총 13회에 걸쳐 짚어본다. <편집자 주>

인물사진최근 방문한 프랑스 파리의 라데팡스. 파리 상젤리제에서 지하철로 20여 분 거리에 있는 라데팡스는 파리의 금융·업무 중심지역이다. 구도심의 개발압력을 해소하기 위해 1960~1970년대 도심 외곽에 건설된 라데팡스에는 유럽에서는 보기 드물게 30~40층짜리 고층 건물들이 즐비하다. 1989년에는 프랑스혁명 200주년을 기념한 신개선문 ‘라 그랑드 아르슈(La Grande Arche)’가 웅장하게 자리를 잡았다.

 

최근에도 첨단 고층 빌딩들이 들어서고 있으며 드넓은 광장 곳곳에는 콜더나 미로, 세자르 등 유명 현대 미술가들의 야외조각들도 볼 수 있다. 모든 자동차가 라데팡스 광장 지하를 통해 지나가도록 해 보행자의 천국으로도 불린다. 라데팡스는 최근 한국 등 전 세계적으로 진행되는 상당수 도심개발 프로젝트의 모델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 프랑스 정부는 2015년을 목표로 고층 건물들의 대규모 재개발사업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기자가 들었던 명성과는 달리, 직접 방문한 라데팡스는 일요일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썰렁하기만 했다. 상젤리제의 상점들은 관광객들로 북적였지만, 라데팡스의 최신식 쇼핑센터는 한가롭기만 했다. 라데팡스가 한가한 것은 외국 관광객들뿐만 아니라 프랑스 사람들에게도 매력도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고층건물들은 굳이 라데팡스에 가지 않더라도 전세계 어디를 가도 흔히 만날 수 있어서일 것이다. 고층, 첨단 건물이다 보니 임대료가 비싼데다 건물 구조적으로 다양한 상점들이 입점하기가 어려워 구도심에 비해 아기자기한 맛이 떨어진다. 라데팡스가 금융업무 중심지일 수는 있어도 매력적인 관광지도, 파리를 대표하는 지역도 될 수 없는 이유이다. 세계적인 관광지는 대규모 개발로 이뤄진 곳에서는 찾기가 어렵다. 오히려 그 지역 특유의 그 무엇을 간직한 곳이 유명 관광지이다.


일본 교토를 찾는 관광객들이 니넨자카, 산넨자카를 찾는 것은 화려한 건물이나 유적이 있어서가 아니다. 볼품 없어 보일 수 있는 옛 가옥들이 몰려 있는 좁은 골목길이 니넨자카, 산넨자카이다. 낡은 주택들에 자리잡은 기념품 가게, 카페, 우동 집을 거닐다 보면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가장 일본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그리스 산토리니와 이태리 카프리섬이 유명 관광지가 된 것도 산등성이에 촘촘히 박혀 있는 낮은 주택들이 빚어내는 색다른 풍광 덕분이다. 자치단체들이 건물의 색깔과 창문의 크기, 건물 높이까지 규제하는 것은 그 지역의 독특한 건물이 빚어내는 풍광이 갖는 경쟁력 때문이다. 스페인 말라가 주변의 산악마을이 세계적인 관광지가 된 것도 옛 그대로의 전통가옥들이 유지된 덕분이다. 비록 건물 내부는 최신식으로 개조를 했지만, 건물외관과 색깔은 전통의 틀을 유지하고 있다.


한국의 각 지방자치단체들이 관광객 유치 등을 목표로 ‘디자인도시’를 표방하고 있지만, 그 지역만의 특색을 보존하기보다는 헐어내고 고층 건물 짓는 데 몰두하고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관광지라고 할 수 있는 경주, 엑스포가 열리는 여수를 가봐도 그 지역만의 거리 모습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산등성이 곳곳에는 전국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아파트, 특색 없는 건물들이 들어서고 있다.


물론 개발을 무조건 금지할 수는 없다. 그래서 외국에서는 기존 건물들을 리모델링하거나 부분적으로 건물을 헐어내는 수복형 재개발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대규모 재개발을 통해 영국의 금융중심지로 재도약한 런던의 도클랜드. 이곳에 유럽 최고층 빌딩인 ‘카나리워프’만 있는 것은 아니다. 과거 항만지역이었던 지역의 특성을 살려 붉은 벽돌로 쌓은 물류창고를 리모델링해 주거용도로 사용하고 있다.


템즈 강변에 자리잡고 있는 런던 버틀러 워프는 80년대만 해도 슬럼화된 낡은 건물들이었다. 노후 건물을 철거한 게 아니라 리모델링을 통해 고급주택과 상가시설로 복원해 새로운 명물이 됐다. 독일 함부르크의 옛 항만지역인 하펜시티는 대대적인 재개발을 했지만 기존 부두 창고 건물을 리모델링해 콘서트홀과 국제해양박물관으로 만들었다.


쇼핑과 패션의 중심지로 유명한 뉴욕 소호도 한국식 재개발을 했다면 지금의 명성은 없었을 것이다. 소호는 가내수공업 공장들로 쓰이던 로프트(loft) 건물이 밀집된 낙후지역이었다. 미술가들이 로프트가 천정이 높아 스튜디오로 쓰기 편리하다는 이유에서 입주하면서 주변에 화랑과 카페 등이 생기기 시작했고, 그 결과 지역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어줬다.


모든 지역을 과거 그대로 무조건 보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그 지역만의 특색이 담겨 있고 문화유산이 있는 지역이라면 그 경관을 유지해야 한다. 개인재산 침해 등의 논란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개발권 거래제도이다. 가령, 문화재나 산지 주변의 경우, 저층으로 짓도록 하는 대신, 규제로 인해 개발이 제한되는 권리를 다른 개발지역에 돈을 받고 파는 것이다. 특유한 경관을 보존하면 그만큼, 지역과 건물의 가치가 올라가 개발이익보다도 훨씬 더 큰 이익을 낸다는 것은 외국의 수많은 사례들이 증명해주고 있다.


<글: 차학봉 조선일보 산업부 차장, 출처: 공감코리아(www.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