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전당] 유현목 탄생 100주년 특별전

[영화의 전당] 유현목 탄생 100주년 특별전

분야
기타
기간
2025.06.28.~2025.07.06.
시간
작품마다 상이
장소
부산 | (재)영화의전당
요금
무료
문의
영화의전당 051-780-6080
바로가기
https://www.dureraum.org/bcc/mcontents/progMovList.do?rbsIdx=61&progCode=20250625001

공연소개

유현목 탄생 100주년 특별전


유현목 감독은 1925년 7월 황해도에서 태어났다. 올해 여름이 그가 태어난 지 딱 100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념해 영화의전당은 유현목탄생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한국영상자료원 등과 함께 ‘유현목 탄생 100주년 특별전’을 마련했다. 그의 연출작 총 43편 중 대표작을 포함하여 엄선된 13편의 영화는 한국을 대표하는 리얼리즘 작가의 성장과 변화뿐 아니라 한국 영화사의 궤적을 보여 주는 지표가 될 것이다.




유현목 감독은 1956년 <교차로>로 감독으로 데뷔하였으며 연달아 <유전의 애수>를 만들었다. 두 작품 모두 멜로드라마의 외연 속에 실존의 고뇌와 구원에 대한 질문을 품고 있었다. 유현목 감독에 대한 평단의 평가가 변곡점을 맞이한 것은 세 번째 작품 <잃어버린 청춘>이다. 전쟁 이후의 허무와 절망, 실존적 고독을 드러낸 작품에는 ‘영화다운 영화’, ‘할리우드의 모방에서 독창’으로 전환되었다는 찬사가 뒤따랐다.




1957년은 한국 최초의 영화 스튜디오들이 연달아 설립된 해였다. 정릉스튜디오에 이어 삼성스튜디오가 설립되었고, 삼성스튜디오에서 두 번째로 제작된 것이 유현목 감독의 <그대와 영원히>다. 전후 한국 사회를 배경으로 범죄에 휘말린 청춘들을 그린 고전 할리우드 스타일의 멜로드라마라는 설정은 전작과 동일했지만, 스튜디오에서 현장을 설계하고 통제할 수 있게 된 그는 본격적으로 정교한 미장센을 구축하기 시작한다. 




1961년 4월 개봉된 <오발탄>은 5〮19 군부 쿠데타 이후, ‘불순 영화’로 분류되어 상영 금지 처분을 받게 된다. ‘개천 하수도에서 어린이를 업은 여인이 목매단 장면을 삭제할 것’을 요구하는 문교부 심사논평서를 시작으로 ‘자본주의에 대한 증오심 조장’ 및 ‘반미감정의 극단화’, ‘사회에 대한 절망적 비전’이 상영 금지 처분의 근거가 되었다. 여섯 군데 화면(‘가자’ 대사와 미군이 명숙을 희롱하는 장면, 상이군인이 한국은행 앞에서 소변 보는 장면 등) 및 대사 삭제와 화면 단축, 추가 자막(‘이승만 정권 하의 빈곤한 사회상을 그렸다.’)을 조건으로 상영 중지 27개월 만에 재개봉되었다.




1961년 겨울에는 <임꺽정>이 개봉되었다. 내내 필름이 유실된 것으로 알려졌던 이 작품은 2022년 미국 의회도서관에서 발굴되어 복원되었으며, 이번 특별전을 통해서 4K 버전으로 최초 공개된다. 홍명희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하였다. 1963년에는 박경리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김약국의 딸들>을 연출한다. 




1965년 <춘몽>에 대한 설명은 이만희 감독의 <7인의 여포로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해당 영화가 반공법 위반으로 감독이 구속되자, 유현목 감독은 「은막의 자유」라는 글을 기고하는데 ‘반공이 국시일 수 없다.’는 그의 논리는 이만희를 옹호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같은 해 그는 <오발탄> <잉여인간> <순교자>의 내용 일부가 용공적이라는 혐의를 받고 반공법 위반으로 입건된다. 또한 <춘몽>의 여배우(박수정)의 뒷모습 나체 장면으로 음화제조반포죄로 기소된다. 이 같은 제재들은 이만희 감독 옹호에 대한 보복성 조치이자 국가 정책에 반발하는 영화계 인사들에 대한 본보기였던 셈이다.




유현목 감독이 법정 공방을 이어가는 동안에도 한국 영화는 코미디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유현목도 1967년 <공처가 삼대>로 시류에 편승한다. 그에게는 일탈에 가까운 이례적인 장르였지만 가부장의 위치를 여성들이 점유하면서 벌어지는 젠더적 갈등과 양상을 능숙하게 담아냈다. 마치 코미디와 드라마의 병행을 통해 작가적 균형을 꾀하는 것처럼 유현목은 같은 해 홍성원의 동명 소설 <막차로 온 손님들>에 이어 한국 초기 실험영화에 해당하는 <손>을 연출한다. 




1968년 연출한 <수학여행>은 신문 기사에서 영감을 받은 코미디로 군산 앞바다에 있는 선유도에서 서울로 수학여행을 떠나는 아이들과 선생님의 좌충우돌을 다룬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비전문 배우라는 것을 생각하면, 영화 장면마다 드러나는 열렬한 호기심과 감탄, 활기와 생동감은 아마 촬영 현장의 그것과 흡사했을 것 같다. 그는 훗날 필모그래피의 마지막 작품인 <말미잘> 촬영을 위해 선유도로 다시 돌아간다. 같은 해, 그는 황순원 원작 소설 <카인의 후예>를 연출했다. 그런데 ‘토지 개혁’ 사건을 소재로 삼은 내용에서 감독은 공산주의자의 악행을 원작보다 더 잔혹하고 악랄하게 부각시킨다. 리얼리즘 작가로 대표되던 그가 기어코 국가 정책에 부합하는 반공영화를 연출할 수 밖에 없었던 속내가 무엇이었는지는 당대 분위기로 미뤄 짐작할 뿐이다.




1979년작 <장마>는 윤홍길의 중편 소설을 원작으로 삼았다. 개인의 미시사적 관점에서 한국 전쟁을 해석하고 민족과 가족의 비극으로 치환하는 과정의 중심에는 샤머니즘이 등장한다. 갈등과 상처를 치유하는 상징으로 민족 정서에 통용 가능한 샤머니즘이 동원되었던 셈이다. 1980년 이문열의 원작 소설에서 출발한 <사람의 아들>은 <순교자>(1965)에 이어 다시 한 번 종교와 인간의 구원에 대해 질문한다. 




월남한 실향민이자 개신교도였던 유현목은 개인의 불안과 고뇌, 좌절과 구원의 문제를 집요하게 질문했고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그래서 유현목의 인물들은 자주 근대와 전근대성, 기독교와 샤머니즘, 분단의 현실과 이데올로기 사이에서 갈등하고 충돌하며 그 과정에서 환경에 의해 짓이겨지고 고통스럽게 몸부림쳤다. '적을 인간으로 묘사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국가적 반공정책과 불화하고 그래서 처벌받고 끝내 전향을 선언한 다음에도 유현목 감독은 가벼운 코미디로 숨을 고르면서 영화 연출을 쉬지 않았다.




유현목의 필모그래피에는 원작 소설에서 파생된 '문예 영화'가 많은데, 이는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그의 일관된 작업 방식으로 파악해야 마땅하다. 문예 영화와 외국 영화 수입권이 맞교환되었던 영화 근대화 정책과 '문예 영화 전성기'로 설명할 수 없는 작품들이 태반이기 때문이다. 대사 위주의 서사 전개에 급급하던 초기 한국 영화들과 달리 유현목은 화면의 구도와 정교한 미장센을 고민하고, 촬영과 조명 같은 시각적 요소들을 중요하게 여겼다. 영상 표현을 위해 다양한 방법을 시도하면서 공간의 배치와 새로운 배열을 통해 인물의 내밀한 심리를 담아내는 방법을 터득했다.




유현목 감독의 영화적 성장과 발전 과정을 한국 영화의 제작 환경 변화 및 기술 발전과 나란히 놓을 수 있다는 전제에 동의한다면, 그가 겪었던 부침, 기소 및 상영 금지 처분은 국가와 이데올로기가 예술 위에 군림하고 통제하려 할 때 발생할 수 있는 폭력의 범위와 양상을 가늠할 근거가 된다. 그래서 유현목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살펴보는 일은 한국 근대사와 공명하는 한국 영화사를 복기하는 일이다.






영화평론가  옥미나


회원 방문통계

통계보기

전체댓글(0) 별점 평가 및 댓글 달기를 하시려면 들어가기(로그인) 해 주세요.

  • 비방 · 욕설, 음란한 표현, 상업적인 광고, 동일한 내용 반복 게시, 특정인의 개인정보 유출 등의 내용은 게시자에게 통보하지 않고 삭제될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문화체육관광부의 정책 및 자료 등에 대한 문의는 각 담당 부서에 문의하시거나 국민신문고를 통하여 질의를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