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개발이란 기억상실을 앓는 서울, 그곳에서 만난 예술가들의 기억
게시일
2010.07.16.
조회수
7401
담당부서
홍보담당관(02-3704-9048)
담당자
조수빈

 당신은 지금 우리나라의 수도 서울의 전경을 보고 있다. 도시 서울, 아름다운가?

해외에 보도된 서울의 전경, 론리 플래닛

외에 보도된 서울의 전경 ⓒ 론리 플래닛


이 사진은 세계 최대의 여행 출판사이며 여행 정보 사이트인 론리 플래닛(Lonely Planet)에 개제된 한국의 최대 도시 서울의 사진이다. 바로 지난해 10월, 론리 플래닛에서는 세계 네티즌들과 여행가들의 의견을 바탕으로 세계 최악의 도시 9곳을 선정하는 흥미로운 설문조사를 했다. 여기에서 서울은 최악의 도시 3위를 차지했다. 이 사이트는 또한 서울을 ‘무질서하게 뻗은 도로, 콘크리트 아파트의 영혼이 없는 도시'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서울은 기억상실증에 걸렸다. ‘재개발’이란 허리케인이 지나가고 나면 도시는 기억을 깨끗이 잃는다. 그리고 그 자리에 회색 콘크리트의 각이 아주 잘 잡힌 아파트가 솟아난다. 서울의 재개발에 대한 정의는 조금 잔인 한 것 같다. 여기저기에서 우리의 도시에 부는 재개발 돌풍은 아직도 식을 줄을 모른다. 어쩌면 서울은 재개발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그런데 여기 허름한 여관 하나가 ‘재개발’에 대한 기존의 삭막한 정의를 거부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어 이슈가 되고 있다. 경복궁 옆 동네 통의동에는 아마 우리나라에서 가장 촌스럽지만 또 가장 시대를 앞서 나가는 여관이 하나 있다. 바로 통의동 보안여관이다.


밖에서 본 통의동 보안여관

밖에서 본 통의동 보안여관 ⓒ 정하늘


경복궁 돌담길을 따라 차분히 걷다 보면 길가에서 어렵지 않게 보안여관을 발견 할 수 있다. 저 촌스러운 간판에서부터 적갈색 반질반질한 벽돌, 그리고 빛이 바래 누렇게 뜬 하얀 창문틀까지. 어릴 적 동네 여관 그대로인 모습이 반가워 방문객들은 가장 먼저 카메라를 꺼내들고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짓는다. 주위의 세련된 갤러리나 커피숍과 달리, 마치 과거 한국 근대사의 한 복판에 서 있는 듯 묘하게 시간이 멈춘 기분이 들게 만드는 통의동 보안여관. 이쯤에서 이 여관의 정체가 궁금하다. 


보안여관이 위치한 통의동은 남다른 역사와 추억을 가진 동네이다. 사실 조선시대부터 우리나라의 역사와 함께한 문화예술의 중심지였다. 통의동은 조선시대 진경산수화로 우리에게도 익숙한 겸재 정선이 벗들과 함께 교류하던 곳이었으며, 추사 김정희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또한 일제 강점기에 요절한 천재 시인 이상이 ‘오감도’에서 묘사한 그 ‘막다른 골목’도 바로 통의동의 한 골목이었다고 한다. 또한 1930년대 한국문학사의 진보적 역할을 했던 ‘시인부락’이란 문학동인지도 서정주 시인이 통의동 보안여관에 하숙하면서 김동리, 오장환, 김달진 시인등과 함께 탄생시켰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보안여관은 숙명적으로 문화예술의 공간일 수 밖에 없는 듯 하다.



통의동 보안여관의 예술을 파는 구멍가게 외부

통의동 보안여관의 예술을 파는 구멍가게 외부 ⓒ 정하늘


일제강점기부터 80여년의 세월 동안 이러한 통의동에서 보안여관은 경복궁 혹은 청와대의 주변에 머물며 시대를 살아가는 문화예술인들과 대한민국 수많은 아픈 역사의 순간을 목격했다. 때로는 오갈 데 없던 지친 그들에게 잠자리를 내어주고, 또 때로는 문화 예술 활동을 할 수 있는 장이 되어 주며 함께 늙어왔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억 상실증에 걸린 도시 서울에서 ‘통의동 보안여관’의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도 문화적으로 매우 상징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결국 ‘통의동 보안여관’은 사람들에게 잊혀 졌고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그래서 2006년 문을 닫고 쓸쓸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듯 했다. 하지만 일맥문화재단과 문화예술 프로젝트 그룹 매타로그가 통의동 보안여관을 인수받아 새로운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을 준비했다.


통의동 보안여관의 내부는 외부보다 더 흥미롭다. 나무 바닥에서 나는 삐걱 거리는 소리가 그저 반갑다. 이제는 옛날 시골집에서나 볼 수 있을법한 형식으로 지어진 낡은 천장과 뜯어져 나간 문짝, 언제인지 가늠도 못 할 정도로 오래된 신문이, 뜯어진 벽지의 한쪽을 그대로 메우고 있는 모습. 그것마저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보안 여관에 처음 들어가면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의 야속함에 왠지 모를 쓸쓸함이 느껴진다. 하지만 어느새 현재와 과거, 즉 시간의 경계가 허물어진 이 공간과 완전히 하나가 된 나를 발견할 것이다. 바로 옆방에 시인 김동리나 이상이 고뇌하며 시를 쓰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 생생하다.



통의동 보안여관의 1층 복도

통의동 보안여관의 1층 복도 ⓒ 정하늘


보안여관의 1층 한쪽 끝에 자리한 ‘예술을 파는 구멍가게’는 순수 예술가들의 기존 작품이나 새로운 창작물들을 일상에 필요한 물건으로 새롭게 제작하여 판매하는 프로젝트 진행샵으로 이곳은 기획된 주제에 따라 해당 기간 동안 주인이 바뀌면서 운영되고 있다.


통의동 보안여관은 공간의 상징적 의미와 특성을 살려 그동안 각종 전시회를 열어왔지만 공연은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하지만 운이 좋게도 기자가 방문한 날엔 통의동 보안여관에선 처음으로 극연구소 마찰의 ‘곶나들이’라는 조금은 특별한 공연이 예정되어있었다. ‘옛 여관에서의 공연을 한다는 사실’ 자체가 매우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러나 왜 하필 통의동 보안여관을 선택했는지 기자는 궁금했기에 ‘곶나들이’의 예술 감독 김철승씨에게 물었다.


“오늘 극연구소 마찰에서 준비한 ‘곶나들이’라는 공연은 작가 이상의 많은 작품들 중 시 9편을 다룸으로서 이상, 금홍, 변동림 이 세 인물의 관계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이 곳 보안여관이 시인 이상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는 아무런 문서적 자료가 남아있지 않습니다. 다만 그 시절 종로에서부터 통의동, 효자동을 통틀어 여관이 이곳 하나 뿐 이였다는 사실과 여러 문인들이 보안 여관에서 오랜 기간 투숙하며 작업에 열중했다는 후배들의 전언들만 있을 뿐이었죠. 그리고 이상이 세 살 때부터 24세 까지 살았던 큰아버지 댁이 이곳 보안여관에서 멀지 않다는 점, 공연의 원작 ‘오감도’가 통의동 집에서 작성되었다는 사실, 이상이 직접 설계하고 운영하던 제비 다방 역시 이곳과 멀지 않았다는 상황을 정리해 볼 때 보안여관이 이상에게 여러 가지로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예측 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보안여관은 특별한 공연 장소였습니다.



곶나들이 공연 모습

'곶나들이' 공연 모습 ⓒ 극연구소 마찰


또한 이렇게 이상과 관계가 깊은 통의동 보안여관에서 Site-specific 공연을 함으로서 관객들이 공연 중에 여관 곳곳을 돌아다니는 배우들과 연출을 따라다니며, 그들이 보여주는 세 인물의 모습과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보안여관에) 현재 모습을 겹쳐 보는 것에서 관람에 재미를 느끼며 스스로 적극성을 부여 할 기회를 주고 싶었습니다.”


드디어 통의동 보안여관에서의 공연이 시작되었다. 실제로 배우들은 여관방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거나 2층으로 올라가는 자유로운 동선을 유지하였고 관객들은 자의적으로 배우의 동선을 따라 함께 움직일 수 있었다. 처음 관객들은 내 옆을 지나가는 배우의 스치는 옷깃에 당황하거나 어색함에 헛웃음을 짓곤 했지만 배우들과 함께 작품 속에 들어와 벽을 만지고 또 내 옆에서 노래하는 배우의 모습을 보면서 이내 작품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특히 실제로 수십 년 전, 작품의 주인공인 이상이 이곳에 머물렀을 것이란 사실에 소름끼치는 짜릿함을 맛보게 하였다. 통의동 보안여관에서의 공연은 관객들뿐만 아니라 배우에게도 쾌감을 선사했다. 배우 유은지씨는 공연이 끝난 후, 통의동 보안여관에서의 공연 소감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곶나들이 공연 모습

'곶나들이' 공연 모습 ⓒ 극연구소 마찰


“실제 작품의 주인공의 흔적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그 공간 그대로에서 내가 연기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을 때, 그 감동은 어떤 다른 잘 갖추어진 텍스트보다도 훨씬 더 깊이 다가왔어요.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가 집중 할 수밖에 없고 또 진중함이 생겼죠. 공간 자체가 80년이 넘었기 때문에 그저 현재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무언가 채워지는 느낌, 그것이 이곳의 매력이에요.”


한국 근현대 문화예술의 기억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통의동 보안여관. 이 새로운 문화공간은 작품에 더욱 강렬한 생명력을 불어넣어 준다. 과거와 현재의 문화가 조우하는 접점에 바로 통의동 보안여관이 있기 때문이다.


여관의 운명이 그렇다. 불특정 다수가 정착하지 못하고 머물다 떠나버린다. 그렇게 통의동 보안여관은 80년간 그 자리를 지켜왔다. 이 나라의 수많은 문화예술을 사랑 했던 이들이 남기고 간 문화의 기억과 함께 말이다. 



공연을 관람하기 위해 대기중인 관객들

공연을 관람하기 위해 대기중인 관객들 ⓒ 정하늘


통의동 보안여관에게 ‘재개발’이란, 한국 현대의 도시들이 산업화시대 이후 기어코 기억상실증을 앓아오면서까지 마치 하나의 트렌드처럼 추종해왔던 초기 재개발의 정의와 다르다. 보안여관은 이제 예전의 소중한 역사, 문화 등 소중한 기억에 현재라는 새로운 개념을 보태는 재개발을 하고자 한다.



통의동 보안여관 입구의 모습

통의동 보안여관 입구의 모습 ⓒ 정하늘


바로 작년인 2009년에는 재개발과 관련하여 큰 논란이 되었던 소송이 있었다. 준비기간까지 합쳐 1년 7개월여라는 기나긴 법정소송까지 불사하며 자신이 사랑하는 서울 성북구 동소문동 한옥을 재개발의 광풍으로부터 막아낸 대단한 애국자가 눈길을 끌었다. 부끄럽게도 그는 한국인이 아니라 미국인 피터 바돌로뮤(61)씨였다고 한다. 도시에서 우리는 스스로 문화와 역사라는 기억을 재개발이라는 명목 하에 지우려 하고 있다. 그동안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 ‘재개발’에 대한 잘못된 정의를 내려 왔던 것은 아닐까. 이쯤에서 우리는 재개발이란 결국 무엇을 위한 것이며 지켜야 할 것 또한 무언인지 ‘한국의 재개발’이란 단어에 대하여 어떤 재정립을 해야 할 것인지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곶나들이 공연 직후의 통의동 보안여관 2층

'곶나들이' 공연 직후의 통의동 보안여관 2층 ⓒ 정하늘


아쉽게도 우리나라엔 아직 통의동 보안여관과 같이 근현대사의 역사를 그대로 간직한 문화예술 공간이 거의 없다. 우리 모두 무작정 옛것이라고 부정하기 전에 그것이 가진 추억의 가치를 한 번만 더 되새겨보길 바란다. 그리고 나아가 도시들이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글,사진/정하늘(문화체육관광부 대학생 기자)

회원 방문통계

통계보기

전체댓글(0) 별점 평가 및 댓글 달기를 하시려면 들어가기(로그인) 해 주세요.

  • 비방 · 욕설, 음란한 표현, 상업적인 광고, 동일한 내용 반복 게시, 특정인의 개인정보 유출 등의 내용은 게시자에게 통보하지 않고 삭제될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문화체육관광부의 정책 및 자료 등에 대한 문의는 각 담당 부서에 문의하시거나 국민신문고를 통하여 질의를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 댓글이 없습니다.